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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130
Target
C_015
Title
고교동창 명진이
Contents
존경보단, 동경이 더 적절한 표현. 반장이었던 명진이는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친구였다. 그 당시 소심하고 말없이 학교집학교집만 왔다갔다하던 나에게 미팅을 주선해 고3 여름방학 이후 공부를 거의 접게 만든 계기를 주기도 했다. 두 번째 사랑의 아픔을 경험했달까? 미팅애프터는 그 해 학력고사는 243갠가로 경희대 입학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다들 서울로 갈 땐 서울대였던 경고똥구두들 사이에 경희대에 간 건 야구부 종근이와 같은 반 영오 그리고 다리가 불편했던 조정석인가 하는 친구와 나 이렇게 넷이 경희대에 들어갔다. 그래도 대학생이 되었던 81학번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모른 체 그렇게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연히 서울대를 간 명진이는 경희대 축제 때 봤다. 여자친구랑 함께 경희대 축제를 찾아 온 명진이를 본게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2021년 쯤 재경 동문회에서 만났다. 소식은 들었지만 몸이 좀 불편했다. 내가 나이 든 것과 똑 같이 명진이도 나이 든 것을 머리색으로 알 수 있었다. 원래 빡빡이던 고교 시절에도 명진이는 흰머리가 있었던 것으로 착각 같은 기억이 난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 현대무용을 부전공으로 뜬금없이 하게 되었고 무용이 내 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아 현재에도 발레바 연습하기를 즐겨한다. 무용은 결국 무대에서 춤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몸언어가 시인이 글언어에 남다른 재기를 가진 것 같아야 한다. 부지런히 몸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꽤 지난한 과정임을 무용수들은 모두 잘 안다. 그리고 몸언어를 익히며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즐거움 또한 모두 다 거치는 과정이다. 일반인이 몸을 이해하고 알게 되려면 무용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몸언어에 대한 공부를 해야한다. 그런데 한국교육의 특성상 그럴 일이 드물다. 어려서 부터 공부만 주구장창 해야 하는게 현실이니 몸언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공부 못하는 학생이나 하는 짓에 불과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이것도 나이 든 사람의 생각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땅의 교육은 몇 몇 아이돌이나 배우 말고는 몸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다. 하지만 보자. 몸이 허술한데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건강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는게 분명한데. 그리고 몸이 좋아야 지속적으로 75세 까지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즉 몸에 대한 이해 없이 공부를 하다보니 공부 단명자들의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가 드물기도 한게 아닐까? 꾸준히 공부를 이어나가야 할 텐데 가만 돌아보면 젊어서 영민했던 학자가 나이 들어서 까지 그 영민함을 유지하는 경우는 드문게 아닐까하고 추정해본다. 어쨌든 명진이 이야기에서 말이 튀었다. 명진이가 해 준 말 긍정적인 사고를 해라라는 말은 내 인생의 나침판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건 매우 소중한 방향성이었다. 고교시절 친구가 한 말 한마디가 내 삶 전반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얼마나 염세적으로 보였으면 그런 말을 해주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키 175센티미터에 체중 49키로그램 정도의 말라깽이 멸치였던 나는 다리 가는게 부끄러워 바지 않에 늘 내복을 입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봐도 자존감과 자괴감이 교차하던 그 시기가 쉽진 않았다. 고교시절 우리 모두는 지금과는 다르지만 대학에 대한 중압감을 달고들 살았다. 특히 경남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지역명문고라는 타이틀을 지키려는 분위기로 교사, 학생 모두 무언가 모를 무게를 하나씩 더 달고들 지냈던것으로 기억된다. 파란색 하복을 입고 시내를 나가면 사람들이 저거 경남고생이다라고 알아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난 그 때 무용이 무언지 몰랐다. 발레가 있고 현대무용이 무어고 한국무용이라는게 있는 줄도 몰랐다. 아마 동창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월북 무용가 최승희 씨의 제자 김백봉이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신예 막달라마리아의 박명숙이 있던 경희대무용과가 있는 그런 경희대 문리대에 가게 된 것이었다. 경희대행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결정 짓는 계기가 됐고 현재에 이르렀다. 81학번 무용친구들과 존경하는 몇 몇 무용과 선배들 78부터 시작되는.. 국문학과 시절 황순원 교수님의 한 마디, 그러면 넌 소설가야라는 취지의.., 하룻밤에 떠 내려간 소설 이제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데 국문과 현역 후배와 전 날 겪은 회기동 사건, 귀로 맞다 귀로라는 제목,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 본 길에 쓰러져 있던 노숙자를 모멘텀으로 했던 그 귀로를 리포트로 발표하자 해 주었던 나로선 격렬한 칭찬. 그럼에도 나는 무용수도 문학인도 행정학도도 아닌 지금 사업가가 되었다. 요 몇 일 후면 명진이가 사무실로 오기로 했다. 반가운 친구다. 내가 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 될 거 같다. 내가 아는 몸공부를 좀 나누고 싶다. 그리고 그 몸공부의 제목을 난 식스티발레라고 이름지었다. 이 식스티발레 몸공부가 사람들 건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남은 생을 즐겁게 살아가려 한다. 그래 난 사업가보단 그런게 어울리긴 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그런 나이가 되기도 했다. 명진아 곧 보자.